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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뒷이야기 (엄인섭 배신, 왕선 독립운동, 안중근 유가족)

by 핑크카샤 2026. 2. 26.

 

솔직히 저는 영화 <하얼빈>을 보기 전까지 안중근 의사의 거사 이후 이야기를 거의 몰랐습니다. 8살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영화 속 독립운동가들이 가족을 뒤로하고 광야로 나서는 장면을 보며 제 안의 수많은 망설임이 떠올랐습니다. 부모가 된 후 내리는 선택은 오롯이 제 몫이 아니라 아이의 인생까지 연결되기에, 그 무게가 두려워 뒷걸음질 쳤던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영화에는 차마 담지 못한 안중근 의사와 독립운동가들의 숨겨진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특히 동지를 배신한 밀정의 실체, 여성 독립운동가의 치열한 삶, 그리고 광복 이후 안중근 유가족이 겪은 비극적 운명까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의 무게를 다시 느껴봅니다.

의형제에서 밀정으로, 엄인섭의 배신

영화 속 김상현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실존 인물 엄인섭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엄인섭은 안중근 의사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운 동지였습니다. 1907년 안중근 의사와 함께 항일 의병을 일으킬 목적으로 군대를 모집하고 자금을 모았으며, 동의회라는 항일 운동 단체를 조직할 때는 최재형이 총장, 엄인섭이 부회장을 맡았죠. 안중근 의사는 "엄인섭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한일합병 조약 이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자, 엄인섭은 변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변절이란 단순히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독립운동을 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일본 측에 독립운동 정보를 제공하는 이중 행각을 의미합니다. 그는 일본의 지시에 따라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공작 활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실제로 엄인섭이 저지른 배신 행위는 참담했습니다. 당시 러시아에서 발행되던 한글 신문 '대양보'의 인쇄 활자 1,000개를 몰래 훔쳐 신문 발간을 중단시켰고, 1917년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을사조약을 주도한 하야시 곤스케를 암살하려던 계획을 일본 측에 제보해 작전을 무산시켰습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영화에서는 김상현이 고문과 압박을 이기지 못해 동지를 배신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 엄인섭의 배신 이유는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성균관대 사학과 임경석 교수에 따르면, 엄인섭이 원했던 것은 돈이었습니다. 카드 노름을 좋아하고 여성 관계가 문란했던 그는 도박과 사치를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것이죠. 당시 일본 영사관은 첩자에게 한 달에 약 45원을 지급했는데, 이는 일본 경찰관 평균 월급 30원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었습니다.

 

제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신념과 가치를 돈으로 팔아넘긴 한 인간의 선택이 얼마나 많은 동지들의 목숨을 앗아갔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엄인섭은 후문에 따르면 죽기 직전 자신의 밀정 행위를 후회하며 쓸쓸히 숨을 거뒀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의 배신으로 인해 희생된 이들의 고통은 결코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왕선의 치열한 삶

영화 속 공부인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실존 인물 왕선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왕선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와 결혼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원래 독립운동가 유창덕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는데, 주로 독립군의 식사와 의복을 마련하고 여성이라서 감시가 덜하다는 점을 이용해 비밀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저는 왕선의 이야기를 접하며,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녀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독립운동의 든든한 후방을 지킨 숨은 영웅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선의 삶은 비극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일본군의 습격으로 독립운동 기지가 함락되었을 때, 그녀는 남편 유창덕과 함께 일본에 체포되었습니다. 남편 유창덕은 일본의 모진 고문 끝에 총살당했고,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신동세 해산도 같은 날 총살당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딸과 아들이 일제에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의 아버지 오사원은 참담한 심정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왕선은 한순간에 남편, 동지, 아버지, 자녀까지 모든 가족을 잃게 된 것입니다(출처: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그러나 왕선은 영화 속 공부인처럼 가족을 잃은 뒤에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년 2개월간 투옥된 후 석방된 그녀는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의 아들 권준과 재혼하여, 인쇄소와 정미소를 운영하며 독립군에 군량미를 조달했습니다. 다행히 그녀는 광복을 지켜보았고, 만주에서 귀국해 한국에서 생활하다 2006년 부산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왕선의 독립운동 공훈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제가 아이를 키우며 매일 작은 선택 앞에서 두려워하던 제 모습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왕선은 모든 것을 잃고도 신념을 지켰지만, 저는 책임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정작 소중한 가치를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하얼빈 의거의 숨겨진 디테일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인 군중 속에 숨어 침착하게 기회를 노렸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군중을 향해 인사하려 모자를 벗자, 안중근 의사는 총 7발을 쏘았습니다. 그중 3발은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과 복부에 명중했고, 나머지는 주변 일본 관리들을 맞췄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렇게 정확한 사격 실력을 보인 것은 철저한 연습 덕분이었습니다. 최재형의 딸 최올가 페트로브나는 안중근 의사가 집 벽에 얼굴을 그려놓고 저격 연습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또한 그는 "3년 내에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암살하지 못하면 살지 않겠다"라고 동료들과 다짐하며,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 피로 혈서를 쓸 정도로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여기서 혈서란 피로 쓴 글을 의미하며,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결의를 다지는 상징적 의식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약지는 이 일로 새끼손가락보다 짧아졌습니다.

 

사건 당일, 안중근 의사는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이중 계획을 세웠습니다. 먼저 기차가 도착하는 지아지스고 역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이 1차 기회를 노리고, 실패하면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다시 시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실제로 지아지스고 역에서는 러시아 헌병이 수상함을 눈치채 역 매점을 봉쇄해 우덕순 일행이 밖으로 나가지 못했지만, 안중근 의사가 미리 대비한 덕에 하얼빈 역에서 거사를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지자 안중근 의사는 권총을 던지며 "코레아 우라(한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는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경찰 앞에 나섰습니다. 당시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는 경찰서에서 안중근 의사를 처음 보고 "매우 젊고 늘씬하며 키가 커 한눈에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며, "경찰이 조금만 주의했다면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재판정에서 외친 진실과 유가족의 비극

안중근 의사는 불공정한 재판을 받았지만, 이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 일본의 역사적 잘못을 알리려 했습니다. 최후 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905년 보호 조약이 체결될 때 한국의 황제와 국민은 누구도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 사실이 없음에도 이토 히로부미는 마치 한국이 희망한 것처럼 말했다. 이번 사건은 결코 잘못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보호 조약이란 을사늑약을 의미하며,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한 불평등 조약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행동이 일본 천황이 내세운 '동양 평화'를 진정으로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재판장은 안중근 의사의 말을 듣기 싫어했지만, 그는 끝까지 당당했습니다. 그의 변호사 미즈노 키치로조차 "그가 사람을 죽인 것은 조국에 대한 진심에서 나온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입니다.

 

결국 안중근 의사는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처음에 항소를 고민했지만, 어머니 조마리아가 "조상의 이름에 먹칠하지 말거라"라고 전한 말을 듣고 항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시체는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독립이 되면 고국으로 반장하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가족은 광복 이후에도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장남 안문생은 7살 때 강변에서 낚시꾼으로 위장한 일본 첩자가 준 과자를 먹고 독살당했습니다. 둘째 아들 안준생은 일제의 압박을 피해 러시아, 중국을 떠돌며 근근이 생활했고, 1939년에는 일본 정부의 지시로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당을 방문해 향을 피우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다만 최근에는 안준생의 친일 행적이 일부 조작되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가 "죽은 아버지의 죄를 반성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일은 이 세상 일이고, 저 세상에서는 평화롭게 지내길 바란다"고 말했는데 일본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발언을 조작했다는 취재가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안중근 의사가 목숨을 바쳐 지키려 한 독립이 단순히 영토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갈 소중한 가치와 정신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자유의 뿌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열들이 일궈낸 고귀한 역사가 다음 세대에게도 온전한 정신적 유산으로 전해져, 대한민국이 더욱 정의롭고 따뜻한 나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매일 닥쳐오는 육아의 선택과 삶의 갈림길 앞에서, 이제는 두려움 때문에 비겁하게 도망치기보다 제가 믿는 가치를 묵묵히 지켜내는 단단한 뒷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적어도 "엄마는 믿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단다"라고 당당히 말해줄 수 있는 작은 용기쯤은 내보려 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YngIrKFOaq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