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정리해고를 당한 가장이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해고된 날은 햇빛이 쨍쨍했지만, 재취업에 성공한 날은 오히려 비가 내렸다는 아이러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저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가족과의 이별을 준비하며 이 영화를 봤는데, '어쩔 수 없다'는 다섯 글자가 유독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딸의 첼로 연주가 상징하는 생존의 역설
영화 속 주인공 만수의 딸 리원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를 앓고 있어 타인과의 소통이 어렵고, 반향어(Echolalia)만 사용합니다. 여기서 반향어란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언어 증상으로,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리원은 첼로를 연주할 때도 곡 전체를 완성하지 못하고 늘 분절된 단위로만 연주했는데, 만수가 재취업에 성공하고 가족이 다시 모이자 처음으로 곡 전체를 완주합니다.
이 장면이 왜 중요할까요? 리원의 첼로 연주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회복될 수 있는 '관계성(Relationality)'을 상징합니다. 쉽게 말해, 리원에게 첼로는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언어였고, 곡의 완성은 가족이 온전히 돌아왔음을 의미하는 거죠. 저도 최근 가족의 위기를 겪으며 '온전한 가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취약한지 체감했습니다. 병원에서 냉정한 진단을 듣던 그 순간,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수척해지는 가족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영화에서 만수의 아내 미리는 리원의 연주 소리를 듣기 위해 문 앞에서 귀를 기울였고, 카메라는 그녀의 귀를 클로즈업합니다. 이는 가족이 회복되었다는 희망의 신호였지만, 정작 만수는 공장의 기계음 때문에 귀마개를 하고 있어 딸의 연주를 듣지 못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대비를 통해 만수가 이미 가족으로부터 단절되었음을,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을 결국 스스로 잃어버렸음을 잔인하게 보여줍니다.
정리하자면, 리원의 연주는 가족의 회복이 아니라 만수만 빠진 채 흘러가는 가족의 미래를 예고하는 복선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장면을 보며 제 가슴이 아팠습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결국 자신만 고립되는 만수의 모습이 너무나 현실적이고 슬펐기 때문입니다.
분재와 벌목,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의 자기파괴
영화에서 가장 섬뜩했던 장면은 만수가 나무 가지를 자르고 철사로 묶어 모양을 만드는 분재(Bonsai) 장면과, 엔딩에서 기계들이 나무를 베는 벌목(Logging) 장면입니다. 분재는 생명체를 자신의 의도대로 통제하는 폭력적 행위로 그려지는데, 이는 만수가 경쟁자들을 제거하며 상황을 통제하려는 모습과 정확히 겹칩니다. 여기서 분재란 나무의 성장을 인위적으로 억제하고 미적 형태로 가꾸는 원예 기법을 말하는데, 쉽게 말해 자연의 생명력을 인간의 의지로 굴복시키는 행위입니다.
반면 벌목 장면은 만수 자신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소모되고 버려지는 '나무' 중 하나임을 상징합니다. 제지 공장에서 종이를 만들기 위해 나무가 무참히 베어지듯, 만수는 쓰임이 다하면 교체되는 수많은 노동자 중 한 명일 뿐이었습니다. 최근 한국고용정보원의 연구에 따르면 국내 중년 실직자의 재취업률은 46.3%에 불과하며, 특히 제조업 분야는 자동화와 AI 도입으로 인력 감축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고용정보원).
제 생각에 박찬욱 감독이 이 두 장면을 대비시킨 이유는 명확합니다. 만수는 분재를 하며 스스로 가해자가 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벌목 기계 앞에서는 무력한 피해자일 뿐이라는 이중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죠. 저 역시 아이가 아직 어려서 육아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일을 줄였는데 이로 인해 수입이 줄어들어 가족의 생계와 직결되니 남일 같지 않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도덕적일 수 있을까요?
영화는 만수가 경쟁자들을 죽이는 과정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생존 게임(Neoliberal Survival Game)의 잔혹함을 극단적으로 형상화합니다. 만수가 제거한 세 사람—구본모, 고시조, 최선출—은 모두 만수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25년 이상 제지업계에서 일했고, 종이를 사랑하며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었죠. 즉, 만수는 자기 자신을 하나씩 파괴하는 자기 파멸의 길을 걸었던 겁니다.
만수가 "배나무가 벌레 때문에 다 죽어가는 게 좀 슬펐다"라고 말한 장면도 의미심장합니다. 배나무는 만수 자신을 의미했고, 벌레는 그가 저지른 범죄였습니다. 결국 만수를 갉아먹는 건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던 거죠.
또한 영화 속 관리자들은 "어쩔 수가 없다"는 말로 해고를 정당화했고, 만수 역시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가 없다"며 살인을 합리화합니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을까요? 만수는 아내가 제안한 대로 원예나 분재 쪽으로 방향을 틀 수도 있었습니다. 선택지가 없었던 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익숙한 세계에 집착했을 뿐입니다. 고용노동부의 2024년 직업전환 지원 프로그램 통계에 따르면, 중년 실직자 중 직업 재교육을 받은 경우 재취업률이 68%까지 상승한다고 합니다(출처: 고용노동부). 즉, 만수에게도 다른 길은 있었습니다.
결국 만수가 재취업에 성공한 공장은 모든 것이 AI와 자동화로 대체된 곳이었고, 사람은 만수 혼자뿐이었습니다. 불이 하나씩 꺼지는 장면은 "당신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시스템의 냉정한 선고였죠. 인간 경쟁자들을 제거했지만, 결국 AI라는 새로운 경쟁자 앞에서 만수는 무력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며 저는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는 진짜 적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게 아니라,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요.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는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광기를, 그리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현대인의 비극을 섬뜩하게 그려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제가 겪고 있는 가족의 위기와 겹쳐지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하지만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또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묻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만수처럼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 영화는 그 질문 앞에서 우리를 가만히 세워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