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 초등학교 입학을 한 아이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 겁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죠. 저 역시 아이가 교문을 들어서는 뒷모습을 보며 안전해야 할 공간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를 보면서 문득 그때의 감정이 떠올랐습니다. 가장 편안해야 할 집이 낯설어지는 설정이, 제 마음속 불안과 닮아 있었거든요. 이 영화는 2025년 8월 13일 개봉한 이상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로, 데뷔작 <엑시트>로 900만 관객을 동원했던 감독이 오리지널 각본으로 완성한 작품입니다.
로맨스를 절제한 각본의 완성도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로맨스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선을 극도로 절제했다는 점입니다. 남자 주인공 길구(안보현)가 14층에 살고, 13층으로 이사 온 선지(유나)를 보고 한눈에 반하는 설정은 전형적인 로맨스 코미디의 시작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 영화에서는 그런 마음이 표현되는 대사나 행동이 놀라울 정도로 적습니다.
여기서 이중인격(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중인격이란 한 사람의 몸 안에 두 개 이상의 독립된 인격이 교대로 나타나는 해리성 장애를 의미합니다. 선지의 경우, 낮에는 평범한 모습이지만 밤 2시가 되면 스스로를 악마라고 주장하는 존재가 그녀의 육체를 장악합니다. 이 설정은 단순한 이중인격이 아니라 또 다른 캐릭터로 명확히 구분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감독이 얼마나 고민했을지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의 전체 분량 중 낮에 선지 상태일 때보다 밤에 악마 모드일 때의 분량이 훨씬 많거든요. 악마 모드 상태의 선지는 <역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처럼 매력적으로 그려집니다. 같은 얼굴을 한 두 존재가 남자 주인공과 함께 있는 장면이 계속 나오는데, 이게 삼각관계처럼 보이면 안 되는 거예요. 최대한 매력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로맨스라는 감정선은 확실히 선을 그어야 하는, 정말 어려운 균형입니다.
귀신의 정체와 나이 설정의 의미
중반부에 들어서면 관객도 선지의 몸 안에 있는 존재가 악마가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여자아이의 귀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영화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최후반부에 밝혀지는 귀신의 정체는 문양이라는 이름을 가진 20살 여성입니다.
여기서 감독의 세심한 계산이 드러납니다. 죽을 때 나이가 20살이었다는 설정은 여자아이도 아니고 완전한 성인도 아닌 애매한 경계선입니다. 이 나이 설정은 로맨스적 감정을 배제하면서도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불쌍한 존재로 그려내기 위한 계산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만약 더 어리게 설정했다면 불편함이 컸을 것이고, 더 나이가 많았다면 삼각관계로 오해받을 여지가 컸을 겁니다.
문양이의 사연도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원통하게 죽었지만,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화장한 재를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어줬습니다. 그 안에서 100년을 지내면 더 좋은 세상으로 갈 수 있었는데, 50년이 지났을 때 누군가 그 항아리를 파냈습니다. 이 설정에서 '더 좋은 세상'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요. 여기서 '성불(成佛)'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성불이란 불교에서 모든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화에서는 이를 동양적 세계관의 '성불'과는 조금 다르게, 하늘의 선녀 같은 특별한 존재가 되어 올라간다는 의미로 재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유나의 연기와 캐릭터의 매력
이 영화는 사실상 유나가 거의 혼자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동일과 주연영 같은 조연 배우들의 분량이 생각보다 적고, 개그 장면도 유나가 대부분 소화합니다. 특히 악마 모드 상태에서 보여주는 연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유나의 연기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이번 영화를 보고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밤마다 길구와 함께 있는 악마 모드의 선지입니다. 케어(Care)라는 개념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데요. 케어란 일반적으로 돌봄, 보살핌을 의미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악마가 나쁜 짓을 못 하게 하기 위해 기분을 맞춰주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인과관계가 반대입니다. 악마가 나쁜 짓을 하겠다고 협박하면서 자기를 기분 좋게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는 거죠.
유나는 이 복잡한 캐릭터를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최대한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각본의 의도에 충실하게 감정의 선을 명확히 그었습니다. 낮의 선지와 밤의 악마 모드를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구분하면서도, 둘 다 같은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게 만드는 연기력은 정말 탁월했습니다. 개그 장면에서도 과하지 않으면서 웃음을 자아내는 타이밍 감각이 뛰어났고요.
엔딩 시퀀스와 감독의 연출력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부분은 엔딩 시퀀스입니다. 선지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결말인데,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은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동안 표현되지 않았던 선지의 마음을 회상 컷으로 보여줍니다. 길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함께 있었던 여러 순간들에 선지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앞에서 계속 절제했던 감정을 엔딩에서 몰아서 보여주는 연출이 정말 탁월했습니다.
영화 이론에서 '옴니버스 서사(Omnibus Narrative)'라는 기법이 있습니다. 이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하나의 틀 안에 배치하여 전체적인 의미를 구성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영화의 엔딩은 일종의 옴니버스 구조로, 관객이 보지 못했던 선지의 시선을 회상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관객은 같은 장면을 다른 시각에서 다시 경험하게 되고, 그동안 절제되었던 로맨스 감정이 한꺼번에 전달되는 효과를 느낄 수 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마지막 컷에서 문양이의 항아리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길구가 문양이의 평온한 안식을 진심으로 바라면서 항아리를 지켜주겠다는 의지가 담긴 장면이죠. 이 마지막 장면은 영화 전체의 주제를 명확히 정리합니다. 단순한 로맨스 코미디가 아니라, 불쌍한 존재를 도와주는 따뜻한 이야기였다는 걸 다시 한번 각인시킵니다.
한국 상업 영화는 대부분 자극적이고 센 내용으로 승부를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근 감독은 소소하지만 공감 가는 웃음과 따뜻한 감동 코드로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엑시트>보다 더 재미있었습니다. 각본의 완성도만 놓고 보면 훨씬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좀비딸>이 웹툰 원작의 재미에 기댔다면, <악마가 이사왔다>는 순수하게 오리지널 각본의 힘으로 승부를 봤고, 그 도전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계가 어려운 상황에서 <좀비딸>과 <악마가 이사왔다>가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면서 한국 영화에 다시 희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두 영화가 합쳐서 <엑시트>의 성적을 넘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결과가 될 거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