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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머시 90분 리뷰 (AI판사, 스크린라이프, 육아고민)

by 핑크카샤 2026. 4. 6.

아이 영어 숙제를 봐주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저도 ChatGPT를 열곤 합니다. 그게 이제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거든요. 그런데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그 자연스러움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AI가 판사 자리에 앉아 사람의 유무죄를 판단하고, 92%의 유죄율을 넘기면 그 자리에서 처형하는 세계. 영화 노머시 90분이 그린 미래입니다.

 

AI판사가 만들어낸 90분의 긴장감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엔 크리스 프랫이 의자에 묶여 앉아 있는 설정이라서 액션이 별로 없겠구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직접 보고 나니 오히려 그 제약이 영화의 가장 큰 무기였습니다.

형사 레이븐은 눈을 떴더니 머시 법정에 회부되어 있습니다. 아내 살해 혐의를 받은 채로요. 여기서 등장하는 AI 판사 매독스는 단순한 소품이 아닙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Presumption of Innocence), 즉 피고인이 유죄로 증명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간주하는 형사법의 대원칙을 기반으로 작동하지만, 증거의 무게 추는 처음부터 레이븐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무죄 추정의 원칙이란 어떤 피의자도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무죄인 사람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근대 형사법의 핵심 개념입니다. 영화는 그 원칙을 표면적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론 레이븐이 처음부터 모든 걸 혼자 증명해야 하는 구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레이븐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90분. 그 시간 동안 경찰 바디캠, 공공 CCTV, SNS 계정, 클라우드 데이터 전부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드문드문 불안해진 건, 저처럼 SNS를 그냥 막 쓰는 사람이라면 저 법정 앞에 앉았을 때 자기 자신을 변론할 수조차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발자국(Digital Footprint)이 곧 증거가 되는 세계였습니다. 디지털 발자국이란 개인이 온라인 활동을 통해 남기는 모든 흔적, 즉 검색 기록부터 SNS 게시물, 위치 정보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스크린라이프가 확장된 방식, FUI

이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FUI입니다. FUI란 Fictional User Interface의 약자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스토리 전달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가상의 컴퓨터 화면이나 인터페이스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스크린 속 데이터 창, 홀로그램 패널, 증거 파일 폴더가 전부 여기에 해당합니다.

감독 티무르 베크맘베토프는 서치 시리즈로 알려진 스크린라이프(Screenlife) 기법의 창시자입니다. 스크린라이프란 모든 장면이 화면 하나를 통해서만 펼쳐지는 독자적인 서사 형식을 말하는데, 커서가 멈추는 순간, 답장이 오기까지의 시간 같은 사소한 요소들이 감정 변화를 대신 표현합니다. 노머시 90분은 그 형식을 평면 화면에서 3D 홀로그램 법정으로 확장합니다.

검색해 보니 기존 스크린라이프 영화들이 주는 답답함이 상당 부분 해소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케빈 카바하르, 하드 벨커, 셰인 벡슬리 등의 디자이너들이 제작한 오리지널 FUI는 맥 OS 기반 인터페이스에서 벗어나, AI 법정의 권위와 속도감을 동시에 전달합니다. 폴더를 열고, 파일을 정렬하고, CCTV를 살피는 행위가 스펙터클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습니다. 특히 롱테이크(한 번의 컷 없이 긴 시간 동안 이어지는 촬영 기법)로 담긴 크리스 프랫과 레베카 퍼거슨의 대면 장면은 화면이 바뀌지 않아도 긴장이 축적된다는 걸 증명합니다.

이 영화에서 FUI가 특히 잘 작동하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머시 법정을 처음 접하는 관객도 바로 파악할 수 있도록 직관적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 증거 채택 여부가 수치(유죄율 %)로 실시간 시각화되어 긴장감이 구체적으로 전달됩니다.
  • AI 판사 매독스의 판단 과정이 FUI를 통해 보이기 때문에, 관객이 레이븐과 함께 추론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 프랫과 레베카 퍼거슨의 연기, 그리고 AI의 자각

크리스 프랫 하면 스타로드나 오웬 그레이디 같은 경직되지 않은 히어로상이 먼저 떠오릅니다. 저도 솔직히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레이븐은 달랐습니다. 90분 동안 의자 하나에 묶인 채로 혼란, 절망, 냉정한 수사, 감정적 붕괴, 마지막 결단까지를 이음새 없이 연기해 냈습니다. 배우 본인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자신에게서 "호감 받고 싶다는 욕구"를 덜어내는 과정이 이 캐릭터를 만든 핵심이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다시 장면들을 떠올려 보니 납득이 갔습니다.

레베카 퍼거슨이 연기한 AI 판사 매독스는 제가 예상한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단조롭고 차가운 AI의 목소리를 기대했는데, 매독스는 재판이 진행될수록 미묘하게 변화합니다. 이걸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적 자각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머신 러닝이란 AI가 데이터를 스스로 학습하며 판단 기준을 발전시켜 나가는 기술을 말합니다. 영화 속 매독스가 단순한 판결 프로그램이 아니라 레이븐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무언가를 학습해 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이 영화의 킥 중 하나입니다. 이 부분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더 이상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레베카 퍼거슨의 억양 변화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보시길 권합니다.

두 배우가 버추얼 프로덕션(Virtual Production), 즉 거대한 LED 스크린으로 사방을 감싼 볼륨 스테이지에서 서로 다른 공간에서 촬영했음에도 케미가 느껴진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AI 기반 영화 제작 기법이 배우의 연기력과 만났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입니다.

육아하는 엄마로서 이 영화가 남긴 질문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또 생각에 빠졌습니다. AI가 아이의 영어 숙제를 도와주는 수준이라면 반갑지만, AI가 사람의 삶과 죽음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는다면 저는 아직 그 세계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현재 저는 AI 사법 시스템에 대해서는 반대 쪽에 서 있습니다. 물론 인간 판사도 편견과 실수가 있다는 건 압니다. 그러나 AI의 판단이 100% 신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알고리즘 편향(Algorithmic Bias)은 현재 AI 사법 분야의 핵심 쟁점입니다. 알고리즘 편향이란 AI 학습 데이터에 내재된 편견이 AI의 판단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미국에서 실제 사용된 형사사법 AI 시스템 COMPAS의 인종 편향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출처: MIT Technology Review).

그러면서도 저는 계속 아이 생각이 났습니다. 다음 주에도 AI 시대 미래 인재 교육 강연을 예약해 둔 엄마로서, 이 아이가 자라서 살아갈 세계에서 AI와 어떻게 공존하게 될지가 더 현실적인 고민이니까요. AI와 동떨어져 살 수는 없지만, 무조건 의지하며 살 수도 없다는 생각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더 단단해졌습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25년 미래 직업 보고서에서 비판적 사고력과 AI 협업 능력을 동시에 갖춘 인재상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출처: World Economic Forum).

영화 노머시 90분은 "AI가 판사가 된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은 관객에게 맡깁니다. 저 역시 아직 정답이 없습니다. 다만 이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를 준 영화로서는 충분히 값어치를 했습니다.

영화 자체는 범인을 찾아가는 결과보다 그 과정의 짜릿함이 더 큰 작품입니다. 극장 큰 스크린으로 봐야 FUI의 스케일과 롱테이크의 압박감이 제대로 전달됩니다. AI와 사법, 인간의 존엄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면, 그리고 그냥 90분 동안 빠르게 몰입하고 싶다면 모두에게 권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법률적 판단이나 전문적인 법률 조언이 아닙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mrCgW72dJ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