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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홍수', 재난물인 줄 알았는데 AI 루프물?

by 핑크카샤 2026. 2. 17.


최근에 대작 소식이 들리지 않아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넷플릭스를 켰다가, 제목부터 웅장한 '대홍수'라는 영화를 만났습니다. 김다미 배우가 물에 흠뻑 젖은 채 고생하는 포스터를 보며 긴박한 재난 탈출극을 기대했건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더군요. 단순히 물을 피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복잡한 설정들이 꽤나 당혹스러우면서도 묘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재난의 탈을 쓴 '이모션 엔진' 학습기

영화는 남극에 소행성이 추락해 전 지구가 물에 잠기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본질은 재난 그 자체가 아니었어요. 주인공 구한나는 신인류에게 주입할 '인간의 마음', 즉 이모션 엔진을 개발하는 연구원이었죠. 인류 멸망의 순간, 신인류(신자인)에게 감정을 학습시키기 위해 수만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과정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사실상 '엣지 오브 투모로우' 같은 루프물에 AI 딥러닝 소재를 결합한 셈인데, 문제는 마케팅이 너무 정통 재난물처럼 되어 있었다는 점이에요. 관객들은 거대한 해일과 생존 투쟁을 기대했는데, 영화는 갑자기 양자역학적인 데이터 학습으로 넘어가 버리니 배신감을 느낄 법도 합니다. 차라리 '이모션 엔진'이나 '이모션 다이브' 같은 제목이었다면 관객들이 훨씬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SF적 설정을 받아들였을 텐데 말이죠.

모성애, 과연 반복 학습으로 완성될 수 있을까?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지점은 바로 '모성애의 학습'입니다. 영화 속 AI는 수만 번의 루프를 거치며 아이를 구하기 위한 최적의 경로를 찾고, 결국 아이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 '엄마의 마음'을 데이터화하는 데 성공하죠. 하지만 실제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보면, 모성애라는 게 과연 데이터의 누적과 반복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걸까요?

 

8살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이 벅차고 때로는 힘겨운 감정들은 단순한 알고리즘의 결과가 아니거든요.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가슴이 철렁하고, 사소한 행동 하나에 웃고 우는 그 본능적인 연결 고리를 '학습'을 통해 복제한다는 설정이 신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서늘하게 느껴졌습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끝까지 지켜내려는 그 뜨거운 마음이, 과연 수만 번의 시뮬레이션 끝에 도달한 '최적의 결괏값'일 뿐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불친절한 설명 속에 가려진 안타까운 진심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감정의 파동을 '대홍수'라는 극한의 상황에 빗대어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설정이 너무 복잡하고 설명이 불친절하다 보니,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에 온전히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버려야 할 장르적 욕심을 끝까지 놓지 못한 느낌이랄까요? 재난 영화로서의 긴박감과 SF 루프물의 지적인 재미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해 안타까움이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다미 배우의 열연만큼은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내내 물에 젖은 채 아이를 찾기 위해 뛰어다니는 그 처절한 몸짓은 데이터 이상의 울림을 주었으니까요. 비록 세련된 명작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인류 멸망의 끝자락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해 보게 만드는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혹은 독특한 한국형 SF의 가능성을 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한 번쯤 감상해 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WTkBtUWjF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