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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리뷰 - 외로움끼리 부딪혀야만 생기는 온기가 있다

by 핑크카샤 2026. 3. 27.

 

애니메이션을 고를 때 저는 보통 아이와 함께 볼 수 있는지부터 따집니다. 화려한 작화, 신나는 음악, 아이가 좋아할 캐릭터부터 찾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면 어른인 저를 위한 애니메이션을 고르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나중에 혼자 소파에 앉아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영화를 골랐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옵니다.

광장은 그런 순간에 만난 영화였습니다.

가장 넓은 곳이 가장 외로운 곳이었다

북한 평양에 파견된 스웨덴 외교관 보리는, 몇 번의 겨울을 보낼 만큼 오래 머물렀지만 여전히 이방인입니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받으면서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사람 하나 없이 지내던 그가 유일하게 답답함을 달래는 방법은 고요한 고속도로에서 혼자 자전거를 타는 것뿐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존 외교관 아우구스트 보리가 파견 생활을 회고하며 남긴 말이 "너무 외로웠다"는 한마디였다는 게,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더 크게 와닿았습니다.

 

광장에서 혼자 원을 그리며 달리는 자전거 장면이 괜히 길게 이어지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건 이동이 아니라, 외로운 사람이 외로움을 버티는 의식 같은 것이니까요.

 

보통 겨울은 춥고 메마른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 작품은 그 추위를 역설적으로 활용합니다. 추위에 발그레해진 인물들의 얼굴을 보며, 그게 단순히 기온 때문인지 아니면 서로를 향한 수줍은 마음 때문인지 모를 묘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특히 두 사람이 가까이 있던 어떤 장면에서는 간질간질한 설렘이 화면을 넘어 전해져서, 무심코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의 풋풋한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혼자 피식 웃으면서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인 광장이 역설적으로 가장 고독한 공간이 된다는 이 영화의 구조가, 보면 볼수록 영리하다 싶었습니다. 넓게 열려 있지만 아무도 진심을 말하지 않는 그곳에서, 보리와 복주와 명준은 각자의 외로움을 부여잡고 서 있습니다. 달걀 하나를 건네는 장면, 헤드폰을 나눠 끼는 장면. 그런 것들이 그냥 소품이 아니라 외로운 사람이 온기를 전하는 방식이라는 게 느껴져서 괜히 코끝이 찡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북한이라는 공간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됐습니다. 우리에게 참 가깝지만 먼 나라인데, 작품 속 북한도 결국은 누군가의 일상이 흐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심이 오가는 곳이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장막을 걷어내고 보면, 그곳도 그냥 사람 사는 동네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은 따로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건 사실 보리와 복주의 로맨스보다 명준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통역관이자 감시자로 보리 옆에 붙어 있으면서 당에 보고해야 하는 명준은, 어느 순간부터 자기도 모르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요.

 

보리와 복주는 적어도 서로에게 마음을 전하고, 남은 시간을 소중히 보내자는 말이라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명준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옆에서 지켜보다가, 당의 명령을 조용히 누락시키는 것으로만 자기 마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사람. 어찌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은 명준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시를 받는 이방인 보리도, 떠날 수 없는 복주도,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전달할 기회가 있었지만, 명준에게는 그 기회조차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세 사람의 외로움이 부딪히면서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따뜻해지는 거예요.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는 상황인데도, 가까워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좁은 틈에서 진심이 오갑니다. 함께 떠나자는 보리의 말을 거절하면서도 남은 시간을 더 소중히 보내자는 복주도, 차마 말 못 할 감정을 명령 누락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한 명준도, 각자의 자리에서 외로움을 작은 사랑으로 바꿔냅니다.

 

이걸 보면서 저 역시 외국에서 일했던 20대 생활이 떠오르더라구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쓰던 그 때, 저도 광장 위의 이방인처럼 혼자 원을 그리던 시간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어 제가 누군가의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려 애쓰는 입장이지만, 그때의 외로움이 어떤 맛이었는지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국경도 이념도 가리지 않는다는 걸, 이 영화는 말 대신 장면으로 조용히 보여줍니다.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진짜 같았다

작화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자면, 솔직히 화려하지 않습니다. 최근 극장에서 흥행한 애니메이션들처럼 눈이 번쩍 뜨이는 작화나 박력 있는 액션 신 같은 건 없어요. 대신 거칠고 덜 다듬어진 듯한 그림체가 이야기의 분위기와 딱 맞아 들어갑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인물들의 발그레한 뺨, 끝없이 펼쳐진 눈밭. 매끄럽게 정돈된 그림이었다면 오히려 이 이야기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덜 예쁘고 거칠어서 더 진짜 같은 그림들이었습니다.

 

묵직하고 거친 채색이 인물들의 불안한 내면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매끄러운 3D 애니메이션이 주는 깔끔함 대신, 덧칠해진 물감처럼 층층이 쌓인 색감이 이 사람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프레임 하나하나에서 작가가 이 장면을 얼마나 애정을 갖고 그렸는지가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화면이 멈춰 있는 것 같은 순간에도 인물의 눈빛이나 미세한 공기의 떨림이 오히려 더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사운드 녹음이 극장에서 보기에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서, 소리에 예민하신 분들은 거슬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졸업 작품에서 출발한 영화라는 걸 감안하면 이해가 되지만, 극장이라는 공간의 이점을 온전히 살리지 못한 건 살짝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 영화에 박수를 치고 싶습니다. 화려한 장치 없이, 친숙한 캐릭터나 유명한 OST도 없이, 오로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만으로 관객을 붙잡는 한국 애니메이션이 나왔다는 게 반갑습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건 곁에 있는 사람의 체온이라는, 소박하지만 강한 이야기를 이렇게 조용하고 담담하게 건네는 영화가 한국에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괜히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한 번 더 잡고 싶어지는 영화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만든 영화입니다.